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근대 일본의 관위와 역직 (문단 편집) ==== 관직 사칭과 햣칸나 풍습 ==== [[막부]] 체제는 [[조정]]의 정치권한을 무사정권이 대행한다는 기이한 형식이었기 때문에 조정과 트러블이 잦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은 막부의 정식 중개와 승인 없이 조정에 직접 임관하여 [[벼슬]] 받음을 엄금하고 이를 어긴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주살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관위는 점차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명예직이 되었다. [[센고쿠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조정의 관위체계와 기존 사회질서가 완전히 붕괴하자, 많은 관직들이 실제 조정의 해당 직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단순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고위무사는 조정에 일정한 [[돈]]을 바쳐 [[매관매직|관위를 사기도 했지만]], 하위무사들이 제멋대로 관위를 참칭하는 사례가 늘자 전국시대부터는 관위가 아무 의미나 권력이 없이 단순히 [[지방(지리)|지방]]의 일개 하급무사들의 [[이름]]을 대신해 부를 때 사용하는 별호나 호칭 구실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례로 치쿠젠에는 가본 적도 없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치쿠젠노카미 [[작위]]를 칭했고, 그 외에도 영지와 전혀 관련이 없게 관직을 칭한 예로는 [[사나다 마사유키|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 [[야마우치 카즈토요|야마우치 ''쓰시마노카미'' 카즈토요]] 등이 있다. 게다가 무식하고 출신이 일천한 자가 발호하고는 자기 멋대로 칭호를 붙이다 보니 없는 [[직책]]의 명칭을 지어내기도 하였다. 예로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는 [[카즈사]] 지방의 [[태수]]라는 뜻의 카즈사노카미(上総守)를 자칭했는데, 카즈사 지방은 천황의 [[아들]], 즉 [[친왕]]이 임직하는 특별행정구역(친왕임국. 카즈사 말고도 히타치·코즈케가 친왕이 임직하는 봉국이었다)이었으므로 태수가 있을 수 없었고, 몇 년 뒤에야 이를 눈치챘는지 카즈사의 국상(國相)이란 뜻인 카즈사노스케(上総介)로 슬쩍 명칭을 수정했다. 그러다 보니 '햣칸나(百官名)'라는 실제 관위와 [[상관]]이 없는 명예성명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일본 [[위키피디아]]는 '''[[가명]]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https://ja.wikipedia.org/wiki/%E7%99%BE%E5%AE%98%E5%90%8D|리스트]] 이 문서에는 무사들이 주로 자칭하던 관위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실제 관위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칭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이묘]]들이 사적으로 가신들에게 관직명을 붙여주고 세습하기까지 했다. [[한자 문화권]]에서 상대방의 [[실명]]을 그대로 말함은, 설령 이름 뒤에 경칭을 붙이더라도 매우 무례했다(실명경피속).[* 그래서 보통은 이런 이름에 해당되는 '''휘'''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 '''자, 호, 아명''' 등을 불렀다. 또한, 이 중에서 '''자'''도 친구사이 같이 아주 친한 사람 사이에만 쓸 수 있고, '''호'''도 일종의 격식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마초]]도 [[유비]]에게 귀순한 후 자로 부르는 무례를 범하다 죽을 뻔했다. 비슷하게 유비도 [[조조]]가 [[여포]]를 처형할 때 여포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 반면 여포가 죽인 [[동탁]]과 [[정원(삼국지)|정원]]은 동 태사와 정 건양으로 불러서 이들의 격을 높였다. 또한 조조도 여포가 유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금했다.][* 이것과 관련되어 예시를 든다면 [[이순신]] 장군의 경우, 이름은 순신이지만 만일 현대인이 타임머신 타고 이순신 장군을 만나서 '이순신 장군님' 이라고 하면 심각한 무례이다. 당시 기준으론 '통상대감'(양반)/'통제사또'(일반 백성)/통상대감마님(종) 이라는 식으로 불러야 한다. 이 경우에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그냥 말할 수 있는건 왕 같이 명백히 상급자가 말하는 경우나, 상소문에서 [[압존법]]을 쓰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을 변호하기 위해 [[정탁]]이 올린 신구차에서 정탁은 이순신을 '이모'라 돌려 썼지만 [[원균]]을 언급할때는 그대로 원균이라 썼다.] 특히 하급자가 상급자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림은 죽을 죄였다. 전국시대 일본은 더 해서 실명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명예성명인 햣칸나로만 부르는 풍습이 생겼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만이 아니라 낮은 [[사람]]도 햣칸나로 불러야 했고, 심지어 면전의 적장도 햣칸나로 호명할 정도였다. 일본 [[사극]]을 보면 나이후니 지부니 교부니 하는 도통 알 수 없는 호칭이 나오는데, 나이후는 '''내'''대신[* 내대신의 약칭이 내부(内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지부는 '''치부'''소보 [[이시다 미츠나리]], 교부는 '''형부'''소보 [[오타니 요시쓰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햣칸나가 실제 벼슬과 관련성을 잃고 가명에 가깝게 사용되다 보니, 나중에는 이름보다 관위가 유명해지는 경우도 생겼다. 예로 [[기리시탄]] 다이묘로 유명한 [[다카야마 우콘]]은 [[본명]]이 '시게토모'지만, 통칭이자 관위인 '우콘' 쪽이 훨씬 널리 알려졌다. 기요오키도 [[시마 사콘]]으로 더 유명하다. 사실 이러한 관위 사칭은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고 타국에서도 [[왕조]]가 분열하여 붕괴되는 과정에서 나오기도 했다. 가령 [[후삼국 시대]]에 [[견훤]]은 [[후백제]]를 세우기 전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를 자칭했는데 이 역시도 신라의 관직, 제도 등을 섞어놓은 것이다. 물론 당연히 [[신라]] 조정에서 전주자사나 어서중승 등의 관직을 내려준 적은 없고 견훤이 아직 [[왕]]을 자칭하고 나라를 세우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 사용한 자칭일 뿐이다. 중국은 [[진나라]] 말에 패공을 사칭한 유방, 천자를 협박해 [[패왕|서초패왕]]을 자칭한 [[항우]]의 예로부터 시작해서 [[후한]] 말에 조정을 휘어잡은 사실상 [[조조]]의 고위관직도 사실상 천자를 꼭두각시처럼 부려서 셀프 승진한 것에 불과하고, 이해득실에 따라 원소와도 자리를 나눠 먹은데다 그에 따라 할거한 군웅들조차 지역을 손에 넣어 실질적으로 그 곳을 다스릴 수 있게 된 뒤 형식상 그 곳을 다스릴 권한을 가진 지위에 오른 경우도 많다. 사실 유비가 한중왕으로 즉위한 것도 엄밀히 따지면 사칭인데 왕작은 천자만이 봉할 수있으니까. 다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왕조의 분열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례이고 왕조가 갈아엎어지는 과정에서 지배층도 어느정도 바뀌다보니 관직이 [[세습]]된다든가 하는 일은 일본만큼 이어지지는 못했으며 없는 관직을 지어냐는 '햣칸나' 관습도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조선 후기 이후 과거시험장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서민들이 상대를 존칭으로 '[[생원]]', '[[참봉]]' 정도로 불러준 것 정도가 비슷하지만, 이것도 없는 직급을 지어내기보다는 말단에 가까운 직급을 사실상 상대를 부르는 대명사로 쓴 경우라 조금 다르다. 게다가 견훤, 유방, 유비, 조조 모두 실제로 원래부터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공무를 수행한 벼슬아치였었기라도 했지, 전국시대 일본의 관위는 이름뿐이고 공직근무와 관련이 없었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진짜배기 공직은 쇼군을 수행 보좌하는 자리였고… 이렇게만 보면 센고쿠 시대에 와서 조정의 관직들이 아무 의미 없는 호칭으로 전락하고 너나 할 것 없이 관직을 사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않았다. 하극상이 빈번하던 시대에 실력만으로 지역을 차지한 다이묘들은 그 지역을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통치한다는 명분과 권위가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은 관위를 받아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해 영민과 호족들의 복종을 받아내려 했고, 이를 위해 형식상으로나마 조정과 막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천황과 쇼군에게 헌상을 바쳤다. 예컨대, 다테씨의 경우에는 막부에 헌상을 바치고 영향력을 행사해 무츠 슈고에 임명되어 봉행이나 유수, 탐제 직책을 받은 동북의 여러 세력들을 권위로 누르려 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다이묘들이 쇼군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아 자기 이름에 썼다. 관서의 대영주인 [[오우치 요시타카]]도 천황에게 거금을 헌상해 다자이노다이니가 되어 오토모와 쇼니씨를 견제하고 규슈의 여러 세력을 포섭했다. 아무리 약육강식이 보편화되고 명예보다는 실력이 중요한 시대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위나 정당성이 아예 필요 없는 시대는 아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